프랑스 남부 옥시타니 레지옹의 중심도시. 오트가론(Haute-Garonne) 주의 주도다.

도시 인구는 475,438명[1], 인근 지역만 포함한 도시권 인구는 약 75만명, 근교를 포함한 대도시권 인구는 1,330,954명[2]으로 파리리옹마르세유에 이어 프랑스 제 4위 규모의 대도시이다.

기원전 – 로마시대

프랑스의 남서부 도시중에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상대적으로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기에 남프랑스의 햇살과 어울리는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툴루즈 지역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것은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이나, 실제로 마을을 이루고 생활하기 시작한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라고 추정되어지고있다. 기원전 3세기 중반부터는 이미 현재의 터키인 지역에서 이주해온 골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그들에 의해 처음으로 약 100헥타르 크기의 요새가 건설되어졌다. 이때부터 이미 툴루즈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지방에 거주하던 타 민족들과 상업적 교류를 하였던걸로 보여진다.

그러나 기원전 107년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골족은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이후 툴루즈는 로마가 점령하던 나르본 지방의 행정적이자 군사적인 수도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1세기에는 현재에도 유적이 남아있는 로마시대 구시가지가 처음으로 건설되어졌다. 그리고 기원후 30년까지 약 14,000석 규모의 원형극장을 비롯해 지금은 사라진 수많은 건물들, 그리고 도시를 둘러싸는 성벽이 지어지게 되었다.

이후 250년에는 현존하는 생 세르낭 성당명에 이름이 붙은 성인인 생 세르낭이 골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려다 이교도 전도사들에 의해 황소 뒤에 매달려 끌려다니다 순교한 사건이 일어났고, 333년~334년에는 보르도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의 성지순례 여정을 안내하는 “Itinerarium Burdigalense(보르도 여정)”이라는 문서가 작성되어졌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Civitas Tholosa”라는 툴루즈의 구(舊)명이 현존하는 문서상에 언급되어졌다. 403년에는 지역에서 크리스트교가 부흥하면서 건축 자재로써 벽돌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서고트 – 알비 십자군

로마제국의 쇠퇴 후로 툴루즈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507년의 부이에 전투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도시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골족계 로마인과 서고트인들이 동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동쪽의 셉티메니아 대공국과 남쪽의 서고트 왕국을 스스로 견제해야할 필요를 느꼈고, 629년에 툴루즈 왕국(Royaume de Toulouse)을 세웠다가 얼마 안있어 프랑크 왕국 휘하 대공령(Grand-duché)으로 들어가며 7세기와 8세기까지 피레네 산맥에서 루아르(Loire), 호데(Rodez)에서 지중해까지 뻗어지는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72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북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우마이야 왕조와 프랑크 왕국이 격돌한 툴루즈 전투[3]가 벌어지고 나서는, 중세에 들어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툴루즈 백작령이 만들어지며 그것의 수도가 되었다.

1096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생 세르낭 성당의 축성을 위해 도시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152년에는 현재의 시청 및 시의회 역할을 하는 꺄피툴라(Capitoulat)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현재 툴루즈 시내의 꺄피톨(Capitole)이란 지명의 유래가 된다.1189년의 도시 반란 이후 금전적 부족과 외부의 위협때문에 백작령의 힘은 대폭 축소되었으며, 꺄피톨라는 현재의 시청 자리에 자신들의 첫번째 건물을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인 1209년에 툴루즈가 속한 랑그독지방에서 카타리파가 힘을 얻자[4],  교황청은 카타리파를 믿는 랑그독지방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토벌을 명령하며 알비 십자군을 일으킨다. 

툴루즈는 십자군 초기에 레몽 6세가 카타리파 토벌에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꿔 베지에와 카르카손이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괜찮을수 있었지만, 1211년에 레몽 6세가 다시 파문당하며 십자군은 툴루즈로 향했고, 공성전 끝에 도시가 함락되자 그는 아들인 레몽 7세와 함께 도주했다. 이들은 지역 도시들의 반란을 주도하며 십자군과 대치했는데, 이 과정에서 십자군의 사령관 몽포트가 전사하고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함에 따라 십자군은 일단 랑그독 지방에서 물러난다. [5]

1222년에 레몽 6세가 사망하자 툴루즈의 백작자리는 그의 아들인 레몽 7세에게 계승되었으나, 그또한 아버지처럼 3년 후 파문당한다. 당시 프랑스 왕국의 왕이었던 루이 8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남하하며 수많은 도시들을 항복시켰고, 공성전 끝에 끝내 아비뇽까지 점령하였지만 1226년 사망한다. 뒤이어 즉위한 나이어린 루이 9세의 섭정인 블랑카 데 카스티야[6]는 레몽 7세의 외동딸과 루이 9세의 남동생을 결혼시켜 이 둘의 자손에게 툴루즈 백작을 계승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결국 1229년에 프랑스 북부의 모(Meaux)에서 만나 협정을 체결했다. 이 때 그가 프랑스 왕실에 잡혀 고문당하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레몽 7세는 이후로도 툴루즈 백작령을 되찾기 위해 애썼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작위를 물려줄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두번의 이혼을 불사하면서까지 자식을 갖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249년에 사망했다. 이로써 툴루즈 백작령은 프랑스 왕실영토에 흡수되었다. 같은해에는 툴루즈 대학(Université de Toulouse)이 최초로 설립되어 교육 중심지로써 가동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실령 – 프랑스 혁명

14세기에 들어 툴루즈는 프랑스 왕실의 지원아래 프랑스 제 4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337년에 백년 전쟁이 시작되고, 1348년과 1361년, 게다가 15세기에도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도시는 약탈과 강도질을 비롯한 위험에 시달렸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까지의 르네상스 시기동안에 툴루즈는 파스텔 제조산업이 발달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장 베르누이 저택이나 아세자트 저택같은 고급 건축물이 많이 지어진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16세기 말인 1560년에는 위그노들과 천주교도들 간의 큰 분쟁이 일어났고, 1562년에는 여왕 칙령으로 위그노들이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고, 그들의 집 또한 약탈당했다.

17세기에는 가톨릭이 대단히 번성하여, 현존하는 교회중 대다수도 이때에 건설된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퐁 뇌프(Pont neuf)와 꺄날 뒤 미디(Canal du Midi)등 현재에도 툴루즈의 명물로 남아있는 사적들이 지어지기도 했고, 또한 오를레앙의 가스통과 함께 내란음모를 꾸미던 몽모렁시의 앙리 2세(Henri II de Montmorency)가 툴루즈의 꺄피톨 광장에서 처형된것도 이 시기인 1632년이기도 하다.  

1762년에는 프로테스탄트가 광장에서 수레바퀴형으로 잔혹하고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처형된 칼라 사건(Affaire Calas)이 일어났다. 볼테르가 이 사건을 두고 “Pièces originales concernant la mort des Srs Calas”라는 문서를 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기간동안 툴루즈는 몇 번의 작은 약탈사건이나 성벽 공격을 제외하고는 그리 심각한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이 시기에 시의회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하기도 했다. 1799년에는 2016년의 레지옹 변경 전까지 쓰이게 되는 “오뜨-갸론”레지옹이 처음으로 구성되어졌고, 툴루즈는 이 레지옹의 수도(chef-lieu)가 되었다.

근대 – 오늘날

1814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만들어진 프랑스 제국과 대영제국스페인 왕국 및 포르투갈 왕국이 툴루즈에서 격돌한 “툴루즈 전투”가 있었고, 나폴레옹의 추락 이후 루이 18세가 재림했을 시기에는 공화주의자와 왕정복고주의자가 도시 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었다.

이후 툴루즈에서 도시사회주의가 득세한데 이어 프랑스의 유명 사회주의 정치인인 장 조레스가 “라 데페슈 뒤 미디”라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신문을 창간했고, 1856년에는 처음으로 철도역이 생겨나고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랑 바자르등을 비롯한 수많은 대형 상점들이 툴루즈 시내 곳곳에 생겨나게 된다.

특징

본래 풍부한 지하 자원을 토대로 한 제철 산업이 발달하였으나, 철광석의 고갈로 인하여 서서히 제철 산업은 쇠퇴하고, 현대에는 프랑스, 더 나아가 유럽 항공우주 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였으며 에어버스 항공기들이 항상 그리워 하는곳이다. 세계 여객기 시장을 미국의 보잉과 양분하는 유럽 최대의 항공기 제작사이자 방위산업체인 에어버스의 본사와 공장이 툴루즈에 있다는 것. 항공기 동호인들은 에어버스 본사 견학을 위해 툴루즈에 들리기도 한다. 물론 별도로 미국과 중국에도 공장이 있다. 툴루즈의 항공기 제조업은 역사가 깊어서, 1937년 설립된 국영 회사 SNCASE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국립 항공우주대학 인근에는 우주과학기술관(Cité de l’espace)도 위치한다. 프랑스와 유럽의 우주기술력을 대표하는 아리안 로켓, 러시아의 소유즈와 미르 우주정거장 일부를 비롯하여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다. 미국 워싱턴의 스미소니언에 비해서는 좀 뒤질지 모르지만, 유럽에서는 단연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몽펠리에처럼 전통적인 대학도시로 이름높은 곳이며, 1229년에 처음 문을 연 툴루즈 대학은 파리 대학에 이은 프랑스 사상 2번째의 대학이기도 하다. 2019년에는 l’Etudiant.fr 선정 프랑스 최고의 학생 도시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7] 현재도 시의 중심 국립대학들인 툴루즈 1대학(캬피톨)[8], 2대학(장 조레스)[9], 3대학(폴 사바티에)[10]은 전세계 대학순위에 꼭 등장한다. 이 셋은 원래 하나의 대학이었기도 했기에 다른 프랑스 도시별 대학들처럼 서로간의 협력 또한 활발하다. 프랑스 국립 항공대학교인 ENAC도 이곳에 위치해있다.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툴루즈 출신이다.